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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ON to MOON
한라산

백록담엔 눈(雪) 대신 눈부신 햇살

by 달의궁전 2020. 1. 5.

 

 

백록담(白鹿潭). 글자 그대로 하얀 사슴이 노닐었을 법한 분화구 앞에 섰다. 하얀 눈이 쌓였을 거라는 기대는 녹아내리고두 군데 바닥에 물이 얼어 있다. 백록담에는 눈()은 없고 눈부신 햇살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날 산행은 오로지 백록담 하나만 생각하고 왔던 터여서 기죽었을 법했다. 그러나 칼바람 부는 정상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조선시대 문인 백호 임제(林悌1549~87)는 정상에서 저 멀리 발아래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서 '백운편'이란 시를 읊었으리다

    

흰 구름 하얗기는 견줄 것이 없고
흰 구름 높기는 헤아리지 못하겠다.

 

하계(下界)에선 흰 구름 높은 줄만 알고

흰 구름 위에 사람 있는 줄 모르겠지.


흰 구름 위에 있는 사람 절로 아느니
고개 들면 하늘문이 한 길 남짓이라.


가슴속 울끈불끈 불평스런 일들을
하늘문 두드리고 한번 씻어보리라.  <출처; 백호시선>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광들은 무상(無常)하다. 붓다가 한 일체의 법()이 그러하고,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모든 게 어긋나버리는 이유다.

 

 

 

 

백록담 정상에 오르기 전에 늘 사라오름으로 향한다. 제사 때 문전제(門前祭)를 지내면서 문전신(門前神)에게 예를 갖추듯이 사라오름에는 한라산 길목 곳곳을 관장하는 신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라오름 지역을 손꼽히는 음택(陰宅; 무덤)’으로 여기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라오름의 산정호수는 살얼음이었다. 허나 긴장감은 없다. 한가롭고 고요함이 전부다. 깃발을 앞세운 단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음악과 잡담, 아니면 가쁜 숨을 벗 삼아 백록담 정상을 향하는 사이 이곳은 극소수 등산객의 쉼터로 남아 있다.

 

 

 

 

커피를 한잔 마신 뒤 관음사 코스로 내려왔다. 도중에 나무껍질이 새하얀 나무가 유난하다. 자작나무과로 좀고채목 혹은 사스래나무로 불린다. 가지들은 저마다 이리저리 휘어진 채 하늘을 항해 뻗어있다. 바람이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어 보인다. 그 자태가 신비롭다. 한겨울 한라산 고지대는 좀고채목과 구상나무가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연출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와서 보니 좀고채목 사진들이 거의 다 사라져 있다.

 

 

 

 

 

관음사 하산 길은 길다. 용암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는 주름바위가 보이면 거의 다 온 셈인데, 주름바위를 건너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또 다른 풍경이 시선을 끌었다나뭇가지들 모습이 드리워진 계곡물이 무척이나 맑고 투명하다물을 벌컥벌컥 들이 키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다. 자연은 늘 새롭다. 그래서일까. 산에 올 때마다 좋은 날로 남아있다.

 

 

    

 

 

 

■ 줄 지어 오르고 줄 지어 내려온 산행

토요일 이른 아침. 성판악에 도착한 버스에서 나 홀로 내렸다. 그러나 성판악휴게소에 훨씬 못 미친 길가 양쪽에는 자가용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성판악 주차장엔 관광버스가 몰려 있고, 새해 첫 주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백미는 한 단체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들며 비장한 각오로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한라산 정상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줄 지어 오르고 줄 지어 내려온 산행. 아마도 주말 산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듯하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아이젠과 스패츠는 가방에서 쿨쿨 잤다. 지난해에 사놓고 아직 써먹지도 못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길 기다렸다가 영실 산행에 나설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