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白鹿潭). 글자 그대로 하얀 사슴이 노닐었을 법한 분화구 앞에 섰다. 하얀 눈이 쌓였을 거라는 기대는 녹아내리고, 두 군데 바닥에 물이 얼어 있다. 백록담에는 눈(雪)은 없고 눈부신 햇살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날 산행은 오로지 백록담 하나만 생각하고 왔던 터여서 기죽었을 법했다. 그러나 칼바람 부는 정상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조선시대 문인 백호 임제(林悌:1549~87)는 정상에서 저 멀리 발아래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서 '백운편'이란 시를 읊었으리다.
흰 구름 하얗기는 견줄 것이 없고
흰 구름 높기는 헤아리지 못하겠다.
하계(下界)에선 흰 구름 높은 줄만 알고
흰 구름 위에 사람 있는 줄 모르겠지.
흰 구름 위에 있는 사람 절로 아느니
고개 들면 하늘문이 한 길 남짓이라.
가슴속 울끈불끈 불평스런 일들을
하늘문 두드리고 한번 씻어보리라. <출처; 백호시선>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광들은 무상(無常)하다. 붓다가 設한 일체의 법(法)이 그러하고,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모든 게 어긋나버리는 이유다.
백록담 정상에 오르기 전에 늘 사라오름으로 향한다. 제사 때 문전제(門前祭)를 지내면서 문전신(門前神)에게 예를 갖추듯이 사라오름에는 한라산 길목 곳곳을 관장하는 신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라오름 지역을 손꼽히는 ‘음택(陰宅; 무덤)’으로 여기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라오름의 산정호수는 살얼음이었다. 허나 긴장감은 없다. 한가롭고 고요함이 전부다. 깃발을 앞세운 단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음악과 잡담, 아니면 가쁜 숨을 벗 삼아 백록담 정상을 향하는 사이 이곳은 극소수 등산객의 쉼터로 남아 있다.
커피를 한잔 마신 뒤 관음사 코스로 내려왔다. 도중에 나무껍질이 새하얀 나무가 유난하다. 자작나무과로 좀고채목 혹은 사스래나무로 불린다. 가지들은 저마다 이리저리 휘어진 채 하늘을 항해 뻗어있다. 바람이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어 보인다. 그 자태가 신비롭다. 한겨울 한라산 고지대는 좀고채목과 구상나무가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연출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와서 보니 좀고채목 사진들이 거의 다 사라져 있다.
관음사 하산 길은 길다. 용암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는 ‘주름바위’가 보이면 거의 다 온 셈인데, 주름바위를 건너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또 다른 풍경이 시선을 끌었다. 나뭇가지들 모습이 드리워진 계곡물이 무척이나 맑고 투명하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 키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다. 자연은 늘 새롭다. 그래서일까. 산에 올 때마다 좋은 날로 남아있다.
■ 줄 지어 오르고 줄 지어 내려온 산행
토요일 이른 아침. 성판악에 도착한 버스에서 나 홀로 내렸다. 그러나 성판악휴게소에 훨씬 못 미친 길가 양쪽에는 자가용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성판악 주차장엔 관광버스가 몰려 있고, 새해 첫 주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백미는 한 단체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들며 비장한 각오로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한라산 정상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줄 지어 오르고 줄 지어 내려온 산행. 아마도 주말 산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듯하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아이젠과 스패츠는 가방에서 쿨쿨 잤다. 지난해에 사놓고 아직 써먹지도 못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길 기다렸다가 영실 산행에 나설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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