他人의 정원33 마른잎 다시 살아나 터무니없는 여름. 열대야는 50일을 훌쩍 넘었다. 그 거침없던 떙볕도 서서이 꼬리를 내리고 있다. 전날 단비에 젖은 풀들도 끝물 탓인지 쑥쏙 뽑힌다. 잠시 의자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니 구름은 너무도 뚜렷하고 밝다. 가을이 아른거리고 있다. 무더위를 먹고 사는 배롱나무는 여전히 꿋꿋하다. 능소화도 서서이 가는 여름을 뒤로 일부 꽃들이 버티고 있다. 자연발아한 루드베키아와 코스모스가 무질서하게 노란색 다툼을 벌이고 있다. 블루세이지를 제외하고 허브식물들은 조용하다. 삼지닥나무의 잎들은 봄인양 싱그럽다. 식물이 사는 세계엔 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나의 무지함으로 그 놀라움은 한층 부풀어오른다. 주인장에게 사망선고를 선포했던 자카란다. 잎은 말라비틀어지고 줄기가 까맣게 변해 귀찮아서 버리지 않고 내버려두.. 2023. 9. 1. 일곱색깔 여름꽃 지난해 파종해 발아한 벨가못이 마침내 꽃을 내밀기 시작했다. 붉은 색을 예상했는데 분홍색이다. 미스김 라일락 뒤에 줄기가 쑥쑥 솟은 채 작은 군락을 이루었는데 든든하다. 타인의 정원 화단은 여름꽃들이 저마다 자기 얼굴을 드러내기 바쁘다. 길가의 접시꽃을 비롯해 패랭이, 백합, 다알리아가 자기만의 색을 다소곳이 펼치고 있다. 그동안 인디언 국화에 눌려 지냈던 에키네시아도 하늘향해 맘껏 기지개를 펴고 있다. 난간에 기대어 붉은 꽃을 무더기로 피어 올린 능소화는 나팔을 불며 마치 자기의 존재감을 동네방네 알리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삽목해서 지난해 심은 산수국도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우고, 2년전 나무시장에서 구입한 유럽수국(영국인지 어딘지 까먹음 ㅠ)은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주인장의 마음을.. 2023. 6. 18. 지피식물 납시오 한 지붕 속 섬 날씨(28일)가 극과 극이다. 제주시는 아침부터 강한 자외선과 함께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반면, 타인의 정원을 향해 평화로를 타는데 비가 쏟아지고 중문 일대는 안개에 휩싸였다. 땡볕 보다는 습기가 많아 눅눅하지만 일하기는 좋다. 지난주 소나무 아래 풀들을 걷어내고 심은 지피식물 하설초가 아무 탈 없이 평온하다. 이름 그대로 마치 여름에 눈(snow)이 쌓인 것처럼 꽃이 핀다니 은근 기대가 크다. 하설초를 심고 나서 색다른 풍경을 경험했는데 아직도 생생하다. 소나무 가지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진 모습이 예술 그 자체였다. 이번에는 발아가 좀 늦은 바위비누풀과 덩굴해란초를 들고 왔다. 배롱나무 아래에 있는 조릿대가 특히 골치다. 안 그래도 주인장이 예전에 조릿대를 걷어 내고 돌을 갖다 넣었는데.. 2023. 5. 29. 길냥이의 식후삼매경 냐~옹, 밥 줘! 냐~옹 낯이 익었는지 고양이들은 어김없이 나타나 밥을 달라고 조른다. 지난 3월 말쯤 처음 마주칠 때만 해도 이 녀석들은 줄행랑을 치곤 했다. 한번은 주인장이 사다 놓은 밥을 주었더니 이제는 친한 척하며 밥 달라고 조른다. 호의를 베풀자 권리인 줄 아는 순간이다. 잠시 모른 척하고 뜸을 들이자, 한 녀석이 아예 드러누우며 항의 농성을 한다. 부스럭거리는 밥 봉지 소리가 나자 잽싸게 밥 먹을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수상하다. 두 녀석만 부지런히 먹고 한 녀석은 떨어져서 지켜만 본다. 안쓰러워 밥을 따로 챙겨 주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지 밥을 먹으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원의 풀을 바지런히 메고 있는데 그 소심한 녀석이 옆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다. 밥을 먹고 바로 .. 2023. 5. 1. "굿바이 무더위" 꽃들의 배웅 무더위는 기록을 남기고 막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올해는 한낮 최고 37.5도에서 부터 한밤 30도, 최장 기간 열대야까지 맹위를 떨쳤다. 한라산 북쪽 제주시가 그랬다. 이에 반해 타인의 정원이 있는 남쪽은 대체로 더웠다. 길가 화단에 늘어선 코스모스를 비롯해 란타나는 때를 만난듯 활기차고 풍성하다. 덩굴시렁 위로 1m 넘게 훌쩍 커버린 흑장미는 다시 검붉은 꽃을 듬성듬성 피우고 있고, 능소화도 아직은 건재하다. 폭염 경보로 떠들썩한 가운데 식물들은 저마다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무더위의 정점에 가장 빛을 발하는 건 배롱나무다. 길가에, 정원에, 심지어 묘지 주변 연분홍 꽃들의 소리 없는 함성은 압권이다. 점점 세를 확장해 풍성해진 부처꽃은 물러날 채비를 하는 무더위를 향해 잘 가라는 듯이 살랑살랑 .. 2022. 8. 21. 한여름 식물 인사발령 주인장이 고민을 많이 했을 법하다. 흩어져 있는 오죽(烏竹)을 한 곳에 모으잖다. 대형 목재 화분과 흙(밭흙, 마사토, 배양토)은 준비 되어 있는데 역시 옮기는 게 문제다. 화분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세 사람이 들어야 옮길 수 있다. 부지런히 삽질을 한 끝에 세 개의 오죽은 마침내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오죽도 팜파스그라스만큼 억세니 설마 죽겠나 싶으면서도 조금은 불안하다. 며칠 지나서 보니 잎이 파릇파릇 살아 있어 일단 안도! 그런데 맨 왼쪽에 4m 정도 되는 오죽 줄기가 검게 변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멋스럽다. 새 보금자리가 맘에 들었나보다. 지난번 사투를 벌이며 캐어내 포기나누기를 한 팜파스그라스도 오죽처럼 대형 목재화분에 옮겨 심었다. 수련(睡蓮)은 긴급 공수했다. 때마침 타인의 정원 인근 .. 2022. 7. 20.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