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없는 여름. 열대야는 50일을 훌쩍 넘었다. 그 거침없던 떙볕도 서서이 꼬리를 내리고 있다. 전날 단비에 젖은 풀들도 끝물 탓인지 쑥쏙 뽑힌다. 잠시 의자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니 구름은 너무도 뚜렷하고 밝다. 가을이 아른거리고 있다.

무더위를 먹고 사는 배롱나무는 여전히 꿋꿋하다. 능소화도 서서이 가는 여름을 뒤로 일부 꽃들이 버티고 있다. 자연발아한 루드베키아와 코스모스가 무질서하게 노란색 다툼을 벌이고 있다. 블루세이지를 제외하고 허브식물들은 조용하다. 삼지닥나무의 잎들은 봄인양 싱그럽다.


식물이 사는 세계엔 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나의 무지함으로 그 놀라움은 한층 부풀어오른다. 주인장에게 사망선고를 선포했던 자카란다. 잎은 말라비틀어지고 줄기가 까맣게 변해 귀찮아서 버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그 자카란타가 풀들 틈새로 새잎들을 길어올리고 있었다. O! 경이로운 순간이다.

클레마티스도 부활의 노래를 소리없이 외치고 있었다. 주인장이 핀 꽃이 예뼈서 사자고 하길래 상태가 안 좋아서 망설였던 식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분갈이를 하고 지켜보았는데 잎들이 시들시들 하더니 회생불능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줄기 하나가 흙을 뚫고 새잎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있다. 목대가 굵어지고 키가 훌쩍 자라난 감나무가 통로쪽에 있어 불편할 것 같아 힘겹게 뽑아내고 산수국을 심었다. 감나무 뿌리들을 정리하고 일단 화분에 옮겨놓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줄기만 앙상한 그 감나무가 나의 선택적 관심을 비웃듯이 새잎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부끄러웠다. 어린왕자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나보다. 언젠가는 반드시 눈앞에 나타난다. 모든 게 드러난다. 그 드러남에 대해 대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뿐이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하기 보다는 되돌아보려고 노력한다.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뽑아 내고 베어낸 풀들을 버리러 왔다갔다 하는데 길냥이 하나가 경계담 위에 축 늘어져 쉬고 있다. "이놈 봐라! 팔자도 좋네!" 먹을 거 다 먹고 나서 한가하게 노는 모양새가 마냥 부럽다. 그나저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울지 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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