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먼발치서 바라 본 어느 나무의 모습은 고즈넉하다. 나는 이 나무의 이름을 모른다.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이 나무는 1년 넘게 변함이 없다. 지난해 봄, 잎은 돋아나지 않았고 지지목에 의지한 채 식물인간이 아닌 '식물나무'가 되고 말았다. 선뜻 버리기 아쉬웠다. 주인장에게 그림이 괜찮으니 지켜보자며 그동안 뜸을 드린 셈이다.
오늘 이 나무와 헤어졌다. 지지목을 풀고 나무를 밀자 맥없이 쓰러졌다. 푸석푸석한 잔가지들은 잔디 곳곳으로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저 담담했다. 흩어진 잔가지들을 손으로 쓸어 모아 바구니에 담기 바빴다.
이 이름 모를 나무 자리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다 수양단풍으로 정했다. 2년전 나무시장에서 구입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녀석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팜파스그라스와 조팝나무가 급성장을 하여 그 사이에서 수양단풍은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낫을 들고 가지들을 쳐 내자 수양단풍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곡괭이와 삽을 번갈아 들며 땀을 뻘뻘 흘렸다. 뿌리가 깊이 박힌 데다 큰 돌들도 나오고 나무 옮기는 일이 만만치않다. 결국 삽 손잡이 부분이 박살났다. 엄살을 부리자면 나무를 살려 옮기려다 내가 죽을 판이다.
올해 정원 일 가운데 소나무 전정 다음으로 중요한 일인지라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 간간이 쉬면서 최대한 뿌리가 다치지 않게 나무 주변을 파 내려갔다. 마침내 수양단풍을 들어올리고 쏜살같이 달려서 이름 모를 나무 자리에 옮겨 심었다. 잘 살아서 내 체면을 살려다오!!!
나무를 옮긴 후 한시름 놓으며 냉수를 벌컥 들이마셨다. 목 넘어가는 물 소리가 우렁차다. 이제 풀도 뽑고 꽃 감상도 할 차례다. 이층 난간에 핀 능소화 몇 송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능소화 줄기가 난간 전체를 덮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내년쯤이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생태계 교란식물로 낙인이 찍힌 핑크뮬리도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섯 포기가 있는데, 오늘 옮겨 심으려다 꽃이 피기 시작해 다음으로 미뤘다.
쿠페아도 꽃이 풍성하게 피어나고 흰꽃나도샤프란이 드문드문 피어나 9월 화단의 느슨함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장미도 가을 꽃을 피우기 위해 새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가운데 흑장미가 이미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이 붉은장미 조차도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바로 그 옆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참으아리가 엄청난 양의 꽃을 피우며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으니 말이다. 서양으아리인 클레마티스가 초여름에 꽃을 피운 뒤 지고나니, 참으아리가 뒤늦게 빛을 발하고 있다. 生死를 실감나게 마주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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