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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ON to MOON
다호뜨락

계획하지 않는 삶

by 달의궁전 2021. 8. 9.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도 더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예기치 않는 일이 벌어져도 긴장감이 오래가지 않거나 무덤덤하다. 딴 세상이 된 과수원 풍경을 보면서 그러려니 한다. 입구 오른쪽은 휑하니 삭막하다.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있던 자리는 콘크리트 벽과 철망이 들어섰다. 휑한 문 앞에서 서서 뒷짐 지고 서성거리다 미소가 슬며시 나온다. 그동안 풀을 베면서 재미삼아 캐어 놓은 어린 묘목들이 제법 자라고 있는데, 요놈들을 써 먹을 때가 왔으니 말이다.

 

♧ 왼쪽부터 돈나무, 보리밥나무, 참식나무, 호랑가시나무

 

 

먼저 과수원 입구 오른쪽에 천선과나무를 심었다. 자연 발아한 어린 묘목을 가지치기 하면서 보살폈는데 나름 의젓하다. 문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는 야자수 세 그루를 심었다. 호기심에 챙겨 놓고 내버려 두었는데, 예기치 않는 상황에서 효자 노릇을 하니 흐뭇함 그 자체다. 야자수 사이에는 지난 6월에 파종해서 자란 루드베키아샤스타데이지를 심었다.

 

 

 

입구 분위기를 고려해 천선과나무 옆에 심은 루드베키아는 벌써 꽃이 올라오고 있다. 바로 옆 수도계량기가 있는데 양옆으로 산철쭉을 심었다. 산철쭉은 가족묘지 주변에 떼 지어 자연 발아한 어린 묘목을 모아놓았는데 70개나 된다. 나머지 산철쭉은 큰형님 터에 옮겨 심었다.

 

 

 

내친김에 입구 왼쪽도 꾸몄다. 햇볕이 덜 들어 음지식물인 털머위가 딱이다. 타인의 정원을 가꾸면서 필요 없게 된 것을 가져와서 키웠는데 무럭무럭 자랐다. 풍성한 털머위를 네 개로 포기나누기를 해서 심었다. 가을이 오면 털머위 사이에 수선화를 심을 생각이다. 과수원에서 밀집해 있던 수선화 구근을 캐어 창고에 잘 모셔놓고 있다.

 

 

 

세상살이 참 묘하다. 내 의지나 바람과 무관하게 변화가 이루어져도 그에 걸맞은 수가 생긴다. 일이 더디게 진행되어도 조급함이나 불편함은 없고 다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만다. 농사를 지으면서 특히 그렇다. 계획할 필요가 없다. 사실 계획해서 제대로 된 일이 얼마나 있었는가를 돌아보면 멋쩍은 웃음만 나온다. , 의도된 행위를 최소화하고 인연이라는 파도를 타면 그게 전부다. 즐거울 수도, 위험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 창고 벽을 타고오르는 담쟁이

 

 

그동안 챙겨 놓은 나무들이 꽤 많다. 하귤과 금귤 사이에는 나무시장에서 2년 전에 무료 나눔한 산수유를 옮겨 심었다. 이 녀석도 관리부실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가 있었지만, 고맙게도 잘 버텨주었다.

 

 

 

과수원 맨 안쪽 모퉁이에는 아왜나무가 자리를 잡고, 창고 옆쪽에는 머귀나무를 옮겨 심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썩 그럴듯해 보인다. 후피향나무를 비롯해 황칠나무, 흰동백나무와 매실나무, 참식나무, 돈나무들이 입주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풀베기 인연이 맺어준 터라 가족이나 다름없다. 

 

 

 

내 키만큼 자라려면 2~3, 목대도 좀 굵어지려면 5, 나무 그늘이 만들어져 낮잠을 자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할 텐데, 서둘러 자라게 하는 마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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