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이 아기자기하게 피어났다. 초여름 화단을 주름잡던 금영화의 기세가 누그러질 무렵, 태양국(가자니아) 양쪽에 있던 패랭이꽃이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지난해 봄, 패랭이꽃 씨앗을 뿌렸는데 모종 3개만이 살아남아 해를 넘겼다. 화단에 옮기고 난 이후 무럭무럭 자라더니 마침내 소탈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패랭이꽃의 영어 이름은 카네이션(carnation), 한자로는 석죽화(石竹花)로 불린다. 석죽(石竹)은 바위에 핀 대나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패랭이꽃의 줄기를 눈여겨보니 실제 대나무 마디와 흡사하다. 또 옛날 서민들이 쓰던 패랭이 모자와 비슷해서 꽃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여러해살이풀로 모종 1개에서 곧추서며 올라오는 줄기들이 풍성하다. 앙증맞으면서도 귀티가 물씬 풍기는 꽃은 자꾸 시선을 유혹한다.
산과 들,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일까. 패랭이꽃을 대하는 시선은 요즘의 ‘금수저’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패랭이꽃(石竹花)
세상 사람들 모두 붉은 모란 사랑하여
뜰 가운데 가득 심어놓고 가꾼다네.
하지만 누가 알랴, 거친 풀 들판에도
어여쁘게 꽃이 피어나고 있다는 걸…
그 빛깔 마을 연못 달빛 아래 투명하고
그 향기 언덕 나무 바람결에 전해오네.
외딴곳 찾아오는 귀한 이(公子) 없으니
자태도 고운 꽃은 농부들 차지라네.
世愛牧丹紅(세애목단홍) 栽培滿院中(재배만원중)
誰知荒草野(수지황초야) 亦有好花叢(역유호화총)
色透村塘月(색투촌당월) 香傳隴樹風(향전농수풍)
地偏公子少(지편공자소) 嬌態屬田翁(교태속전옹)
고려 전기의 충신인 정습명(鄭襲明: 1094~1150)은 부귀영화의 상징인 모란과 달리 패랭이꽃을 자신의 딱한 처지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 시로 인해 그는 임금의 총애를 얻어 출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강직한 품성 탓에 올곧은 소리만 하다 왕의 미움을 산 나머지 독약을 들고 자결하였다. 씁쓸하기 그지없다.
모란은 귀족적, 패랭이꽃은 서민적이라니 꽃에도 귀천이 있을까. 다 생각이 지어낸 것일 뿐. 오늘 나무시장에 잠시 들렀다가 패랭이꽃 씨앗을 샀다. 내년을 기약하며...
패랭이꽃 <류시화 詩>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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