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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ON to MOON
식물의 사생활

귀티 나게 소탈한 패랭이꽃

by 달의궁전 2020. 7. 15.

패랭이꽃이 아기자기하게 피어났다. 초여름 화단을 주름잡던 금영화의 기세가 누그러질 무렵, 태양국(가자니아) 양쪽에 있던 패랭이꽃이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지난해 봄, 패랭이꽃 씨앗을 뿌렸는데 모종 3개만이 살아남아 해를 넘겼다. 화단에 옮기고 난 이후 무럭무럭 자라더니 마침내 소탈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패랭이꽃의 영어 이름은 카네이션(carnation), 한자로는 석죽화(石竹花)로 불린다. 석죽(石竹)은 바위에 핀 대나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패랭이꽃의 줄기를 눈여겨보니 실제 대나무 마디와 흡사하다. 또 옛날 서민들이 쓰던 패랭이 모자와 비슷해서 꽃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여러해살이풀로 모종 1개에서 곧추서며 올라오는 줄기들이 풍성하다. 앙증맞으면서도 귀티가 물씬 풍기는 꽃은 자꾸 시선을 유혹한다.

 

 

 

산과 들,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일까. 패랭이꽃을 대하는 시선은 요즘의 금수저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패랭이꽃(石竹花)

 

세상 사람들 모두 붉은 모란 사랑하여

뜰 가운데 가득 심어놓고 가꾼다네.

하지만 누가 알랴, 거친 풀 들판에도

어여쁘게 꽃이 피어나고 있다는 걸…

그 빛깔 마을 연못 달빛 아래 투명하고

그 향기 언덕 나무 바람결에 전해오네.

외딴곳 찾아오는 귀한 이(公子) 없으니

자태도 고운 꽃은 농부들 차지라네.

 

世愛牧丹紅(세애목단홍) 栽培滿院中(재배만원중)

誰知荒草野(수지황초야) 亦有好花叢(역유호화총)

色透村塘月(색투촌당월) 香傳隴樹風(향전농수풍)

地偏公子少(지편공자소) 嬌態屬田翁(교태속전옹)

 

 

고려 전기의 충신인 정습명(鄭襲明: 10941150)은 부귀영화의 상징인 모란과 달리 패랭이꽃을 자신의 딱한 처지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 시로 인해 그는 임금의 총애를 얻어 출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강직한 품성 탓에 올곧은 소리만 하다 왕의 미움을 산 나머지 독약을 들고 자결하였다. 씁쓸하기 그지없다.

 

 

 

 

모란은 귀족적, 패랭이꽃은 서민적이라니 꽃에도 귀천이 있을까. 다 생각이 지어낸 것일 뿐. 오늘 나무시장에 잠시 들렀다가 패랭이꽃 씨앗을 샀다. 내년을 기약하며...

 

 

 

패랭이꽃   <류시화 >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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