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햇살은 토요일 아침 유리창 너머로 기웃거렸다. 그리곤 “자네 지금 집에서 뭐하는가? 냉큼 밖에 나가지 않고..”라며 내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새파란 하늘은 티 하나 없이 맑고, 백록담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겨울, 봄 하늘과 같은 날 집에 있는 건 불가능하다. 영실을 통해 윗세오름(영실과 어리목코스가 만나는 곳)을 가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집을 나섰다.
버스터미널에서 240번 버스를 타고 영실매표소로 향했다. 어리목입구에서 15분 정도 더 가야 한다. 영실로 산행을 하려면 중간에 1100고지나 영실입구에서 내리면 안 된다. 영실매표소에서 내려야 하는데, 산행을 위해 영실탐방로까지 가려면 이곳에서 2.5km 더 걸어가야 한다.
영실매표소에 11시 넘어서 도착을 하니 안내하는 분이 서두르라고 한다. 겨울에는 12시까지 가야 영실탐방로를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입장료를 내면 택시나 자가용으로 영실매표소에서 탐방로까지 갈 수 있다. 굳이 차를 이용할 필요성을 못 느껴 서둘러 걸어갔는데, 오르막이라 땀이 제법 났다. 12시가 다 되어 영실탐방로 입구에 다다르니, 안내자가 밖에 나와 있다. 아슬아슬하게 통과!!!
그런데 안개가 제법 자욱하다. 한라산 날씨가 아무리 변덕스럽다지만, 쾌청한 하늘을 기대하고 왔으니 좀 의외다. 탐방로를 들어서니 산행을 시작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다. 아침 일찍 어리목 입구를 통해 윗세오름을 지나 영실로 하산하고 있는데, 난 이제야 시작이다.
나무로 우거진 숲을 지나고 영실기암 전망대까지 왔지만 안개는 더욱 맹위를 떨쳐 사방팔방은 온통 하얗다. “분명히 아침에 보니까 한라산이 뚜렷하던데...” 라며 뒤에 따라오는 일행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경상도 말투였다. 나 역시 잠시 망설여졌다. “계속 가야 하나...” “너무 늦게 왔다고 한라산 산신이 화가 나셨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발걸음은 오르막을 내딛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모습을 담으려고 잠시 멈췄다. 순간 뭔가 노랗고 둥그렇게 생긴 물체가 희미하게 하얀 장막 뒤로 보이는 듯 했다. 해를 가려버린 안개의 심술이 야속하기만 했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데 저 멀리에서푸르스름한 하늘이 보이더니, 이어 거무튀튀한 게 살짝 보이는 듯했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계속 바라보았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그 거무튀튀함의 실체는 바로 기암괴석이었다. 고개를 돌려 발 아래 먼 곳을 바라보니 자욱한 안개 사이로 오름 윗부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Fantastic!” “Unbelievable!” 내 뒤쪽에 있었던 2명의 외국인 남녀가 외쳤다. 그리곤 외국인 여자는 남자에게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어조로 “I love you!”라고 다정하게 건넸다. 윗세오름을 향해 오르거나 영실 쪽으로 내려가던 등산객들도 탄성을 내질렀다.
자연이 부리는 마법에 홀려 얼마가 지났는지 감이 안 잡힌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안개 옷을 벗어던진 세상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멀리 기암괴석들은 당당하게 병풍을 치고, 세상의 온전한 모습이 내 발 아래로 펼쳐 있었다. 새파란 하늘은 아침에 보았던 바로 그 하늘이었다. 안개가 끼었다 걷히기도 하고, 먹구름과 햇살이 뒤섞이는 변덕이 산 날씨지만, 눈 앞에 이런 극적인 모습을 앞으로 볼 기회가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아침에 나를 뒤흔든 눈부신 햇살은 한라산 정상에서도 안개를 쫓아내고 강력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선작지왓을 향해 가는데 나무에 쌓인 눈이 힘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순간 ‘눈부신 햇살’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했다. 햇살이 눈을 부시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햇살’과 ‘눈을 부셔 녹여버리는 햇살’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셈이다.
선작지왓에 들어서자 왼쪽 족은오름을 시작으로 누운오름, 그리고 백록담이 펼쳐졌다.
▲ 길게 펼쳐진 풍경을 담기 위해 사진 3장을 겹쳤다.
족은오름에 올라 세상을 구경했다. 저 멀리 구름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그 아래로 많은 오름들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들처럼 점점이 떠 있고, 선작지왓을 수놓은 관목들은 듬성듬성 쌓인 눈과 어우러져 한 편의 걸작을 연출하고 있었다.
족은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윗세오름을 향하여 눈도장을 찍고 어리목 입구로 내려왔다.
백록담 위에 솟은 달과 오름 위로 솟은 해의 배웅을 받으며 4시간에 걸친 영실-어리목 산행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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