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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ON to MOON
애지중지 音樂

Schubert Piano Sonata in B-Flat Major D.960

by 달의궁전 2023. 11. 11.

영화 <The Favourite: 여왕의 여자>는 2019년에 개봉했다. 1705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을 배경으로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을 둘러싼 두 여인의 암투를 그렸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출신인 하녀 ‘애비게일(엠마 스톤)’은 여왕의 총애(favourite)를 받아 신분상승을 노린다. 이를 위해 여왕과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이자 정부(furtive lover)인 권력의 실세 ‘사라(레이첼 와이즈)’와의 갈등이 펼쳐진다.
 

 
영화 <The Favourite: 여왕의 여자>는 음악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 영화는 비발디, 바흐, 헨델의 바로크 음악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곳곳에서 음악을 통해 분위기와 연기자들의 심리를 관통하고 있다.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22)과 페라리(Luc Ferrari 1929-2005)의 현대음악도 선보였다. 여왕이 다리 통증 호소로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페라리의 ‘Didascalies’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은밀하게 서서히 끌어올린다. 흥미롭게도 사운드트랙 목록에 없었는데, 슈만의 음악이 등장한다. 영화 4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녀 애비게일을 해고하라는 사라의 권고에 여왕은 거절을 하며 마차를 타고 떠나는데, 이때 피아노 5중주(Piano Quintet in E-Flat Major, Op. 44) 2악장이 흐른다. 이후 갈등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이 곡이 등장한다.
 

 
뜻밖의 음악은 또 있었다. 애비게일이 참석한 궁중 음악회에서 ‘Music for a While(음악은 잠시 동안)’을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크 초기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1659-1695)이 작곡한 이 음악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존 드라이든(1631-1700)의 연극 “오이디푸스(1692)”에 삽입된 부수음악이다.
 
Music for a while
Shall all your cares beguile.
 
Wond'ring how your pains were eas'd
And disdaining to be pleas'd
Till Alecto free the dead
From their eternal bands,
Till the snakes drop from her head,
And the whip from out her hands.
 
가사를 살펴보면 의미심장하다. 음악은 잠시 동안 당신의 걱정을 앗아갈 것이다. (Music for a while / Shall all your cares beguile.) ‘beguile’이란 부정적 단어를 사용했으니 음악으로 인해 걱정이 ‘잠시’ 사라질 뿐이다. 또 음악이 어떻게 고통을 누그러뜨릴지 의아하고, 기만과 음모를 품은 채 기뻐할 가치가 있을지 의문을 갖는다. (Wond'ring how your pains were eas'd / And disdaining to be pleas'd). 게다가 분노의 여신 알렉토(Alecto)까지 등장한다 .
 

 
이 음악을 부르는 동안 왜 애비게일의 불안한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지 곧 드러난다. 애비게일이 독을 탄 음료를 마신 사라는 말을 타고 가다 의식을 잃게 되고 행방불명이 된다. ‘Music for a While(음악은 잠시 동안)’ 노래가 끝날 무렵 실종된 사라가 나타나고, 애비게일의 음모는 외면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한다.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당신 스스로 자신에게 재앙이지.. 그대는 앞을 보면서도 자신이 어떤 악() 속에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소...바로 그 행운이 그대를 파멸시켰소.”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사실 뒤늦게 영화 <The Favourite: 여왕의 여자>를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슈베르트의 음악 ‘Piano Sonata in B-Flat Major D.960’ 때문이다. 이 음악은 나의 총애(favourite)를 받고 있는지라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측한대로 B-Flat 장조 소나타 중 2악장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장면에서 나온다. 
 

 
여왕의 총애를 받고 신분상승을 한 애비게일.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토끼 중 한 마리를 발로 누른 뒤, 미소를 띠며 토끼를 놓아준다. 토끼의 여린 신음소리에 침대에 누워있던 여왕은 깨어나고, 이를 목격한다. 여왕은 일어나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앤 여왕은 자식 17명이 유산하거나 어려서 죽어, 대신 토끼 17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여왕에게 토끼는 죽은 자식들의 분신과 같은 존재인 셈이다.)
 
“의자에 앉으세요 라며 애비게일이 여왕에게 다가서자
“누구 맘대로 여왕 몸에 손을 대?" (How dare you touch the Queen like that.)
”죄송해요.“
“입을 열라고 안 했어.” (I did not ask you to speak.)
 
힘겹게 일어나 벽에 기댄 여왕은 “다리 좀 문질러 (My leg. Rub it.)라고 말한다.
 
다리를 문지르던 애비게일은 “누우세요.”라고 하자
“내 허락 없인 입 열지 마 (You will speak when asked to.) “어지럽네... 뭘 좀 잡아야겠어 (I am so dizzy...I need to hang on to...)
 
여왕은 애비게일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쥔다애비게일은 움츠러든다대사는 끝나고 여왕과 애비게일의 '알 수 없는' 표정만 화면에 떠돈다애비게일과 여왕의 얼굴이 오버랩 되고다시 토끼들이 오버랩 되다가 화면은 검게 막을 내린다. 

 
슈베르트의 ‘B-Flat 장조 소나타 D.960’는 그가 세상을 떠난 1828년에 완성한 3부작(D958, 959, 960) 가운데 하나다. 이 음악을 알게 된 건 올 여름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피아노의 시간’ <더퀘스트 출판>이란 책에는 슈베르트의 Piano Sonata in A major D.959가 실려 있었다. 낯선 이 음악을 듣고 난 뒤, 최후의 소나타 D.960과 마주하였다.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r 1915-1997)가 연주한 'B-Flat 장조 소나타'를 처음 접하는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언가 말을 거는 듯 하지만 인식의 영역은 해체되고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냥 그대로 좋을 뿐이다. 슈베르트가 음악으로 남긴 '유언장'과 같은 ‘B-Flat 장조 소나타'는 40분을 훌쩍 넘는 긴 연주시간임에도 물흐르듯 흘러간다.  ‘어떻게 여태 이 음악이 있는 줄 몰랐을까’라며 스스로를 나무랄 뿐.
 
"음악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렇다고 침묵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31살이라는 터무니없이 짧은 삶을 살다간 슈베르트는 살아생전에 가곡으로만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가곡의 왕’이란 수식어가 지금도 따라다니곤 한다.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슈베르트와 가까웠던 몇몇 친구와 동료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재능 수준을 넘어서는 그의 천재성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슈베르트의 놀라운 성취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from ‘슈베르트 평전’ <풍월당 출판>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인 브뤼노 몽생종 (Bruno Monsaingeon)이 펴낸 ‘리흐테르-회고담과 음악수첩’에 보면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리흐테르가 당시 소련에서 슈베르트 소나타를 최초로 연주했는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에서 보잘 것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즉흥곡들은 그런대로 자주 연주되는 편이었고 ‘방랑자 환상곡’(D.760)은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연주되었다. 반면에 그의 소나타들은 연급조차 되지 않는 듯했다. 하긴 서구에서도 '아르투르 슈나벨' 이전에는 사정이 비슷했다. 소련에서는 내가 최초로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구세대의 교수들은 이렇게 말하기 일쑤였다. '왜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거 아주 따분하다네. 차라리 슈만을 연주하게'.” ► 리흐테르가 언급한 '아르투르 슈나벨(1882~1951)'은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로, 영화 <The Favourite: 여왕의 여자>에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Piano Sonata in B-Flat Major D.960 2악장’은 그의 연주이다.
 
슈베르트가 따분하니 차라리 슈만을 연주하라고? 그들은 영화 <The Favourite: 여왕의 여자>에 등장하는 슈만의 '피아노 5중주'가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다.
 
“슈만의 실내악 작품 중 가장 사랑받고 있는 <피아노 5중주>는 고전적인 형식미를 충실하게 구현하면서도 슈만 특유의 낭만적 시정과 환상을 자유롭게 펼쳐낸다. 특히 슈만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2번>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from <클래식 백과, 이은진>
 
리흐테르와 함께 ‘음악의 수도승’으로 불리는 글렌 굴드(1932-1982)도 처음엔 슈베르트의 소나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1957년 모스크바에서 리흐테르의 연주를 들은 후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슈베르트의 반복적이고 장황한 수사학적인 음악에 인내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리흐테르가 B-Flat 장조 소나타의 긴 곡을 아주 천천히 연주하는 걸 들으며, 최면에 걸린 황홀한 상태에서 슈베르트의 반복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그의 소나타는 체계적으로 통합적임을 알게 되었다.”
 

 
브뤼노 몽생종 (Bruno Monsaingeon)은 리흐테르와의 힘겨운 인터뷰를 통해 책을 발간함과 동시에 꼬박 1년에 걸친 편집을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 ‘Richter- The Enigma’ (1998)를 제작하였다. 이 귀한 영화는 고맙게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데 영어 자막이 있으니 보는 데 크게 지장은 없다. 영화의 시작은 Schubert의 'Piano Sonata in B-Flat Major D.960 2악장'로 시작해서 끝도 역시 Schubert의 'Piano Sonata in B-Flat Major D.960 2악장'으로 마무리된다. 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다. 이 음악을 모르고 살았으면... 슈베르트의 ‘B-Flat 장조 소나타’가 있어 삶이 보잘 것 있어 보이는 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I think of Schubert, scribbling on a cafe napkin. Thank you, thank you." Mary Oliver
"나는 슈베르트가 카페의 냅킨에 악보를 휘갈기는 걸 떠올린다. 고맙고 또 고마워요."